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천국의 북벌 (문단 편집) === 지원군의 허망한 최후 === 한편 산동순무 장량기(張亮基)는 이런 북벌 지원군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는데 당시 [[산둥성]]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태평천국]]과 호응했고 증립창이 이끄는 지원군은 방어가 취약한 곳을 집중하여 공략했기 때문이었다. 증립창은 관현에서 신속하게 북상하여 임봉상과 회합하기로 결정했는데 다음 목표는 임청(臨淸)[* 현재 [[산둥성]] 랴오청(聊城)시의 현급 시인 린칭(臨淸)시]으로 삼았다. 당시 임청은 [[황하]]의 지류와 산동성 내의 육로가 만나는 곳으로 물산이 풍부했기에 보급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임봉상과 예하 북벌군이 포위된 부성까지는 160km 밖에 떨어지지 않아 며칠이면 도달 가능한 지척이었다. 장량기는 이 소식을 듣고 휘하 부대 2000명 중 1000명을 이끌고 임청으로 가서 방어를 시작했다. 3월 30일에 증립창이 이끄는 지원군은 임청에 도착했고 장량기 및 임청의 수비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3월 31일, 지원군은 임청의 서남쪽에 진영을 차리고 4천 여명의 군대를 동, 서로 나뉘어 몇 차례 공격을 했지만 성의 수비가 단단해 점령할 수 없었다. 단, 성 밖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포위를 굳히는데는 성공했다. 당시 증립창이 이끄는 본진은 임청 성 남문 밖의 마을을 거점으로 삼아서 주둔했고 임청의 동, 서, 남 삼면의 목책을 쌓고 총포를 설치하여 단단히 포위했다. 한편 임청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함풍제]]는 부성을 포위하고 있던 승보에게 지원을 명했다. 이에 응해 승보는 7천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하여 4월 1일에 임청에서 약 80km 거리인 정가구(鄭家口)[* 현재 [[하북성]] 헝수이(衡水)시 구청현(故城県) 정커우진(郑口镇)]에 도착했다. 4월 2일과 4일에 지원군은 다시 한 번 임청에 [[지뢰]]와 [[공성 병기]]를 동원하여 총공격을 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오히려 장량기와 승보는 군을 출격시켜서 지원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지원군은 [[보급]] 문제로 곤란에 처하게 됐다. 당시 중요한 것은 신속한 북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 보급을 해결하기 위하여 임청에 발이 묶이게 된 증립창은 임청 공격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4월 10일에 승보가 임청 성에 들어왔는데 그는 증립창이 임청의 동북과 서북에 보루를 세우고 그 사이에 주력군을 뒀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11일에 성의 서북쪽 미타사(彌陀寺)에 있는 태평천국의 군영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근처의 [[참호]]에도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다급해진 증립창은 12일에 총공격령을 내렸고 기어이 성의 서문과 서남쪽 성벽을 파괴하여 진입에 성공했다. 승보는 미타사에서 지원군을 보내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낼 수 없어 도주했고 성은 점령됐다. 하지만 북벌 지원군은 상처뿐인 승리만을 거뒀는데 [[황하]]에서 임청까지 보름만에 온 반면 임청에서 무려 12일을 허비하면서 신속한 북상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청나라]]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게 됐다. 또한 국지적인 승리와는 반대로 기대했던 보급은 성의 함락 직전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고 남은 것은 빈 성 뿐이었던 것이다. 또한 부성에 있던 북벌군은 피동적으로 지원을 기다렸을뿐 탈출이나 협공을 하지 않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임청에서 머무르던 지원군은 16일에 성의 서편에 [[부교]]를 설치하고 야간에 행군하려 했으나 청나라가 부교에 불을 질러서 실패했다. 18일에 다시 성의 서남쪽에 [[부교]]를 설치했지만 다시 청군이 불을 질러버렸다. 그러자 군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면서 통제가 어지러워졌는데 특히 새로 가입한 항복병, [[도적]] 및 유민, [[안휘성]] [[염군]] 출신들이 문제였다. 이들은 [[태평천국]]의 교리를 믿어서가 아닌 이득에 따라서 움직이는 무리라서 충성심이 깊지 않았고 통제가 극히 어려워서 군율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기존 [[태평천국]] 출신은 전체 군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증립창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야간에 성의 서남쪽 포위망을 뚫고 해하(海河)의 지류인 위하(衛河)를 건너서 북상하고자 했다. 승보는 이것을 알아차리고 [[흑룡강성]] 및 [[몽골]] 출신의 기마병을 위주로 [[매복]]을 준비했고 18일 새벽에 강을 건널 준비를 하던 지원군을 타격했다. 이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원군은 성 안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4월 20일 밤, 승보는 다시 출병하여 성 외곽을 공격하였고 증립창은 이를 간신히 막아냈다. 그리고 증립창은 300명의 기마병을 도하하게 하여, 다시 청군이 오면 협공하려고 했다. 4월 22일, 승보는 병사를 셋으로 나누어 공격하였는데 한밤 중이었기 때문에 지원군은 청군이 가까이 올 때 까지 몰랐다. 청군은 강을 건너 보루 주변에 도착하고는 맹공격을 가했다. 10여 곳의 보루에 불이 붙었고,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 판단한 증립창은 남쪽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2000 여명의 기마대가 남문을 나와서 화기를 동원하여 먼저 길을 뚫었고 뒤이어 증립창이 이끄는 본대 역시 남쪽으로 퇴각했다. 한편 청나라군은 북벌 지원군이 성을 포기하고 나갔음을 나흘이 지난 26일에 알아차렸고 곧바로 성을 점령한 후 신속히 쫓아와서 싸움을 벌였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28일에는 청수진(清水镇)[* 현재 [[산둥성]] 랴오청(聊城)시 구안현(冠県) 칭수이진(清水镇)]에서 퇴각하던 북벌 지원군은 다시 한 번 전투를 벌였지만 패했다. 한편 청나라군은 기세를 높여서 쫓아갔지만 누적된 피로와 승리로 인해 방심했고 이에 북벌 지원군은 반격하여 29일에 진사보는 정예병 1000명을 동원해 [[화포]]를 통한 화공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는 크게 승리하여 청나라군의 진영이 크게 불타고 병사와 [[군마]]들이 도망쳐서 북벌 지원군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러자 증립창은 '''청요(清妖)[* [[청나라]] [[요괴]]라는 멸칭. 태평천국은 적대세력에 요(妖)라는 한자를 붙여서 멸칭으로 칭했다.]를 쫓아 죽이면서 방해 없이 부성(阜城)으로 가겠다. 그러면 역전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병사들에게 북진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벌 지원군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염군]], [[도적]], 항복병 등은 이를 반대했고 또한 부사령관인 허종양과 진사보는 신병 통제의 어려움을 들어서 역시 반대했다. 거기에 더해 진사보는 독단적으로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하는 등 군은 분열되고 있었다. 증립창은 별 수 없이 퇴각을 결정했는데 퇴각 역시 신속치 못하고 그간의 피로로 인하여 30일에는 쉴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군은 새로운 부대를 배치하여 압박을 계속했다. 5월 3일, 북벌 지원군은 관현(冠县), 양산집(梁山集), 거야현(巨野县)[* 현재 [[산둥성]] 허쩌(菏泽)시 쥐예현(巨野县)]을 거쳐 풍현(豊縣)에 도착했는데 그 사이 기간동안 추격해온 청나라군에게 연달아 패하면서 최악을 향해 가고 있었다. 북벌 지원군은 풍현 성 외곽에 목책을 세우고 사격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5월 5일에 승보는 병사를 나눠서 사면에서 풍현을 공격했고 목책이 불타면서 성은 함락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증립창은 이경(二更)[* 밤 9시 ~ 11시] 쯤 군을 이끌고 성의 동쪽으로 나왔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후퇴하는 북벌 지원군의 앞에는 [[황하]]의 만구지하(漫口支河)[* 만구(漫口)는 부숴진 [[제방]]이라는 뜻이고 지하(支河)는 지류라는 뜻. 즉 부숴진 제방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류였다.][* 당시 [[황하]]는 지금보다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 때 강물이 급격히 불어나서 신속한 도강은 어려웠고 병사들은 허우적 거리며 말 위에 올라타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때 증립창은 허종양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후방을 끊어서 퇴각을 도왔다. 그리고 쫓아온 청나라군과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증립창은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황하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7500명의 군대는 물에 빠져 죽거나 진흙탕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청군에 의해 사망했다. 남은 병사 2300여 명만이 허종양의 인솔하에 [[난징시|남경]]으로 돌아갔다. 한편 증립창에게 반발하며 단독으로 남하하던 진사보는 순조롭게 내려가고 있었다. 진사보가 거느린 부대는 전투 경험이 많은 1000 여명의 정예병이라 별 탈 없이 한 차례의 전투만을 거쳐서 [[황하]]를 건넜다. 진사보는 [[안휘성]] 경내로 진입하여 [[태평천국]]의 서정군에 합류하려 했고 봉태현(鳳臺縣)[* 현재 [[강소성]] [[화이난]] 펑타이현(鳳臺縣)]에 도착했다. 이 때 봉태현의 단련(團練)[* [[청나라]]의 지방 [[민병대]] 조직] 무장수령(武裝首領)[* 단련(團練)의 지휘관]인 왕은수(王恩綬)가 [[태평천국]]에 가담하겠다면서 편지를 보내 전구집(展沟集)[* 현재 [[안휘성]] 보저우(亳州)시 리신현(利辛县) 잔거우진(展沟镇). 당시에는 펑타이현(鳳臺縣) 소속이었다.]으로 진사보를 초대했다. 진사보는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전투력이 높고 별 탈 없이 남하하는데 성공하여 방심에 차서 초대에 응했고 왕은수가 사는 마을에 들어가서 [[술]]과 [[고기]]를 먹고 곡식을 거둬들였다. 진사보가 술에 취한 것을 본 왕은수는 미리 마을 밖에 매복시킨 단련 소속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했고 기습을 받은 진사보는 옷도 걸치지 못하고 병사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진사보의 부하 1000 여명 중 300명 정도만이 포위를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북벌 지원군은 처음의 기세는 좋았으나 한 곳에 발이 묶이면서 동력을 상실했고 구성원들의 불화 및 의견의 불일치로 스스로 자멸하면서 북벌군의 지원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